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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통일을 위한 노력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우리나라는 천 년 이상 하나의 국가로 살아왔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온 나라가 힘을 합하여 맞섰으며, 일제강점기에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도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분단된 지 70여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휴전이란 이름으로 아슬아슬한 평화가 유지되는 가운데 통일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크고 작은 결실이 맺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사업은 그와 같은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사업은 2007년부터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이 통일부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남북관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는 어떤 노력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은 공동으로 협력할 사업을 논의하면서 개성의 문화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데 힘을 합치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2005년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지원을 위한 남북공동학술대회’가 열렸으며, 2007년부터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2006년 개성 실무협의(2006.3.18) [기록 바로가기]

 

그럼에도 갈 길은 멀었다  
그러나 실제로 첫 삽을 뜨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보통 해외여행을 가려면 여권이 있어야 하지만, 남과 북은 특수한 관계이기 때문에 개성을 방문하기 위해선 통일부에서 발행한 ‘방문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 여권대신 사용한 '방문증명서'

 

마침내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2007년 5월 15일 남측 조사단원은 트럭 두 대에 발굴 장비를 싣고 만월대에 도착했습니다. 벅찬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고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땅을 파며 흙투성이가 되어야 했고, 콘테이너로 된 숙소에 도착해서는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 숙소로 사용한 콘테이너 박스


▲ 발굴조사단 숙소 내부 모습

 

남과 북이 발굴하기로 합의한 서부건축군은 33,000㎡이나 되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만월대는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후 그 터는 지켜져 왔으나 실제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만월대의 중심건축군은 회경전·장화전·원덕전이 있던 곳이라고 밝혀져 있었지만, 서부건축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기록에 남아있는 내용과 교차 검증해야 할 곳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2007년도 첫 발굴은 전체 지역의 유구를 확인하는 시굴조사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발굴조사는 서부건축군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령전 터, 대형 계단, 금속활자, 기와, 전돌, 청자 등을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2013년에는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발굴이 진행되었을까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시굴과 본 발굴로 이루어집니다. 시굴은 시굴갱을 깊고 좁게 설치해 차곡차곡 쌓여있는 토층의 층위와 문화층의 양상을 조사합니다. 본 발굴은 시굴조사를 바탕으로 유적의 평면 배치 및 유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후 본 발굴을 통해 확인된 유구 및 작업과정 등은 사진으로 기록됩니다. 유구 사진 자료는 그 자체로 기록물의 가치를 가집니다. 

 

토층조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이 어떠한 지형적 변화를 겪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만월대는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면서 궁궐이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다양한 시기의 토층이 쌓여있습니다. 그래서 조사단은 지층의 퇴적 순서를 확인하고 출토유물을 살펴 연대를 추정합니다. 

 

색과 상태로 토층을 구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금을 그어놓고
해석을 달리 합니다.
(토층작업 중인 조사단원)

 

다음으로 조사한 유적에 대한 실측과 도면 작업이 진행됩니다. 이 작업은 넓은 면적의 유적을 일정 비율로 축소하여 도면에 담아내는 과정으로서 유적 정보 기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현장 실측은 3D 스캔 작업을 통해 데이터로 구축되기도 합니다. 3D 스캔 작업을 통해 구축한 데이터는 유구도면작업 및 만월대 유적지의 전반적인 분석에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발굴하고 있는 유물 현장에 대해서
3D 스캐닝을 해서 유구 도면
데이터를 만드는 작업중입니다.
(유구도면 제작 중인 조사단원)

 

 

다음 단계는 유구 조사와 유물의 수습으로 발굴 작업의 핵심을 이루는 공정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자칫 유물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꽃삽이나 호미 같은 작은 도구를 사용합니다. 유물을 발견하면 일단 도면을 작성하고 사진을 찍는 등 기록작업을 먼저 실시한 후 유물을 수습합니다. 작은 물건의 경우 주변의 흙까지 수습하여 세척한 후 고운 체로 걸러 유물을 채취합니다. 
 

칼 같기도 하고 길이만 본다면요.
그래서 출토 위치가 정확한 곳에서
사진 한번 찍고 수습하려고 합니다.
(유구조사 중 유물을 발견한 조사단원)

 

 

현장에서 수습한 유물은 세척과 분류작업을 거칩니다. 출토된 유물은 접합 과정을 통해 최대한 원형대로 복원하고 문양 등을 확인합니다. 선별과 접합 작업이 끝난 유물은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고유 번호가 부여됩니다. 유물에는 지워지지 않게 직접 고유번호를 기입하고 별도의 장부에 유물번호, 재질, 출토 위치 등을 기록합니다. 
 


파편들을 접합해서 하나의 개체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유물 접합 중인 조사단원)

 
만월대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제적 관례에 따라 남측으로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북녘 땅에 있어야 합니다. 대신 남측 조사단은 현장에서 발굴한 유구와 유물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고 3D 스캔 작업을 하였습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이 자료를 갖고 유물 복제품을 만들고 홀로그램도 제작하여 전시회를 통해 남측 시민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유물사진 촬영하고 있어요.
유물을 남측으로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확인도 하고 자료로 남기는 거죠
(유물 촬영 중인 조사단원)

 

 

3D스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3D 데이터를 남측으로 가지고 가서 
홀로그램을 만들 계획입니다. 
(유물을 3D 스캔하는 조사단원)

 


만월대 발굴 현장에서 경험한 작은 통일

남북의 조사단은 만월대 현장에서 한 식구가 되어 작은 통일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 남과 북이 함께 만나고 보니 무엇보다도 서로 말이 잘 통해서 다른 외국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도시락(남)-곽밥(북), 괴수무늬(북)-도깨비무늬(남)처럼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서 한참 어리둥절했던 일조차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조사단은 발굴과정에서 전문영역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서 갖는 특별한 동질감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조상의 자취를 함께 찾아낸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느꼈던 생소함과 차이는 점차 사라졌고, 동질감과 공감은 신뢰와 믿음이 되어 그 자리를 채워갔습니다. 이것은 작은 통일의 과정이었습니다. 

 


▲ 제1차(2007년) 조사단 기념촬영
조사단의 노력으로 발굴된 유구와 유물 관련 자료가 이곳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 기록관’ 웹사이트에 구축되었습니다. 현재 발굴조사는 2018년 제8차 발굴조사를 마친 시점을 기준으로 서부건축군 전체 면적의 60% 정도 이루어진 셈입니다. 서부건축군에 대한 보존 사업과 중심건축군 및 동부건축군으로의 조사지역 확대 등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기간만큼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 바로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입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는 서부건축군을 넘어 계속되어야 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조만간 누구나 직접 만월대를 답사하고 개성으로 여행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상으로 보는 <발굴에서 디지털 기록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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