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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의 역사
고려 궁궐, 만월대 

만월대는 475년 고려왕조의 도읍지인 개성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 궁성 터입니다. 마치 조선에는 경복궁이 있던 것처럼, 고려에는 만월대가 있었습니다. 송악산 자락에 아름다운 궁성이 구름처럼 지어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빈 터만 남아 있습니다.

 

사실 만월대라는 이름 역시 그 빈 터를 찾아간 사람들에 의해 붙여졌습니다. 본래 고려 궁성에는 별도의 이름없이 본궐·본궁·정궁 등으로 불렸는데, 고려가 망한 후에 많은 사람이 ‘망월대(望月臺)’ 혹은 ‘만월대(滿月臺)’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망했어도 고려의 충신들은 남아 있어 만월대를 찾아가 망국의 한을 노래하였던 것이지요. 

 

▲ 만월대 전경
 
고려 궁궐이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게 된 것은...

개성은 신라 시대에는 송악이라 불렸으며, 고려의 도읍지가 되면서 개경이라고 불렸습니다. 개성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에는 송악산이 있고 서쪽에는 예성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성강 포구에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가 있습니다. 왕건의 조상들은 이 지역의 호족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개성의 관문인 예성강 포구에서 크게 해상무역을 해왔다고 합니다.

 

만월대 서쪽 예성강가에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과 할머니인 용녀(龍女)가 살던 영안성이 있었습니다. 영안성과 만월대 중간쯤에는 왕건의 할머니인 용녀가 팠다는 ‘대정(大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작제건과 용녀는 만월대의 북쪽, 지금의 광명사 터에 집을 지었고 이곳에서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을 낳았습니다. 

 


▲ 동여도에 그려진 개성과 영안성의 위치(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포털)

 

왕융은 어른이 되어 좀 더 아래쪽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만월대 자리입니다. 승려 도선(道詵)은 집을 짓고 있던 왕융을 찾아와 지세를 살피며 장차 삼국을 통일할 아들이 태어날 것이니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왕융 부부는 도선의 조언에 따라 다음 해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었습니다. 

 

왕융은 18세가 된 아들 왕건과 함께 신라가 국운을 다해 후삼국으로 분열하는 시기에 철원에 있는 궁예를 찾아가 그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왕건은 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명성과 덕망을 얻었습니다. 반면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폭정을 일삼는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몰아내자고 설득했습니다. 왕건은 처음에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그들과 뜻을 함께하여 새 나라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라고 정했습니다. 왕건은 919년 철원을 떠나 고향인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에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만월대입니다. 

 


 

​고려 궁궐 만월대의 흥망성쇠

고려 궁성 만월대는 한 번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왕건이 처음에 궁성을 지은 이후 후대 왕들이 부지를 넓히고 건물도 새로 지었습니다. 광종은 개국 초기 혼란했던 정국이 안정되자 개경을 ‘황도’라 칭하고, 2년 동안 궁궐을 새로 지어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습니다. 그러나 현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010년 거란의 2차 침략이 발생하게 되어 궁궐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거란이 물러난 후 개성으로 돌아온 현종은 다시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현종은 전보다 궁궐을 크게 지으면서 건덕전 동편에 회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만월대 중심건축군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만월대는 궁성·황성·나성에 둘러싸인 고려의 중심 궁궐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잠깐 고려의 성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궁성을 둘러싼 황성은 태조 왕건이 세웠고 가장 밖에 있는 나성은 거란의 3차 침략을 막아낸 강감찬 장군의 건의로 쌓기 시작하여 102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한편 황성 밖, 나성 안쪽의 내성은 고려 말에 지어져서 조선 개국 후에 완성되었습니다. [관련 콘텐츠 바로가기]

 


▲ 개성성의 위치

 

현종 대에 다시 지은 만월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당시 만월대의 모습이 1123년에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에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도 합니다. 서긍은 공식적으로 사신단의 인원·선박·예물을 관장하는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의 직책을 갖고 있었지만, 고려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종의 ‘첩자’ 임무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긍은 송나라 휘종의 명에 따라 한 달 동안 체류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만월대에 관해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현재 『고려도경』의 그림은 소실되었고 글만 남아 있습니다. ‘첩자’가 남긴 기록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에게 만월대가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서긍의 기록을 토대로 만월대의 중심 건축군을 살펴보면, 회경전은 만월대의 정전으로서 사신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장화전은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었고, 원덕전은 왕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밖에 신봉문 앞쪽에 위치한 구정에서는 격구와 같은 운동경기가 열렸습니다. 

 


서긍이 기록한 만월대 전각 위치 

만월대는 서긍 방문 3년 후인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인종은 1132년부터 5년 동안 다시 만월대를 재건하였는데, 경령전과 비서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과 궁문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만월대를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다시 지어야 했던 인종의 울분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월대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의 화재와 산사태로 만월대는 소실과 재건을 거듭했습니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 약 40년 동안 방치되기까지 했습니다. 1270년 강화도에서 환도한 원종은 만월대를 거의 새로 짓는 수준으로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만월대는 공민왕 때인1361년 10만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이미 고려의 국력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만월대는 재건되지 못한 채 빈터가 되었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의 운명과 같이 ‘만월대’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만월대를 자주 찾으며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만월대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기도 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은 일제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으로 승화되어 ‘황성옛터’라는 대중가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황성옛터’인 만월대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선인들의 흔적과 자취들은 이제 남과 북이 함께하는 공동조사를 통해 하나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월대의 역사는 고려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원하고 발굴해야 할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들입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