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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만월대 방문을 독촉한 이유는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월 27일(양력) 1번째 기사 -
『황성신문』1909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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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1909년 1월 27일 오전 6시 30분 창덕궁을 나온 순종 황제는 고종 태황제가 머무는 덕수궁으로 향했다. 멀리 서북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직접 살피는 순행을 떠나기 전에 태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자 한 것이다. 며칠 전 6박 7일의 경부선을 이용한 남순행에서 돌아온 지 2주일 만에 단행된 서북순행이었다.
남대문역(現 서울역)에 도착한 순종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대한제국 대신들을 휴게실에서 접견한 후 함께 임시로 편성된 궁정열차에 올랐다. 순종을 모시며 서북 순행에 오른 279명의 호종원 가운데 일본인은 81명이나 되었다.
정각 8시가 되자 출발한 궁정열차는 경의선을 타고 북상하다가 개성역과 신막역에 잠깐 정차했다가 오후 3시 45분에 첫 번째 목적지인 평양역에 도착하여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순종은 다시 북상하여 신의주에 도착했는데, 다음날인 29일에는 태조가 회군을 했던 위화도에 행차를 세우고 지방관을 보내 옛 터를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의주 정주 등을 거쳐 2월 2일 3시 55분 개성역에 도착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많은 왕이 개성을 찾았다. 그러나 순종의 개성 행차는 선왕들의 행차와 크게 달랐다. 수많은 대신과 며칠씩 걸쳐 가던 곳을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들러 몇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순종의 행차는 본인의 의사가 아닌 이토 통감이 기획한 행사였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순종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늘 이토 통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파가 몰아치는 2월 3일 오전 10시, 단발에 신식 군복 차림을 한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두툼한 망토까지 걸치고 개성의 숙소를 나섰다. 순종이 전용 마차에 오르자 수십 명의 대한제국 관료들과 이토 통감을 비롯한 통감부 관료들은 각각 인력거에 나눠 탔고, 말을 탄 무관들은 순종과 관료들을 호위하며 송악산 남쪽 기슭 아래 만월대로 향했다.
만월대에 가까워지자 마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순종은 준비된 ‘남여(藍輿)’로 옮겨 앉았다. 8명의 남여꾼들은 순종이 탄 남여를 메고 만월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일산을 든 하급관리는 황제에게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애를 썼다.
황제가 탄 남여는 천년의 세월을 간신히 버틴 채 듬성듬성 남아 있는 석축과 허물어지고 있는 흙더미를 바라보며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를 지나 회경전 앞 가파른 33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무뎌진 계단돌 사이마다 삐죽삐죽 솟은 채 바싹 마른 잡초를 비껴가며 겨우 오른 만월대 허허벌판 위에는 듬성듬성 보이는 주춧돌들이 한없이 처량하고 스산했다. 이날 폐허가 된 만월대를 둘러보면서 순종 황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만월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사진 속 순종 황제의 꼭 다문 입술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만월대를 관람한 순종은 1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환궁했다. 이날 시간이 촉박하여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목청전에는 가지 못하고, 태종 이방원의 잠저였던 경덕궁에만 들려야 했다. 순종은 조선의 왕들이 개성을 방문하면 반드시 찾아가 참례를 하던 목청전도 가지 못할 정도로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토 통감에 의해 만월대에 올랐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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