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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천도 후에도 조선의 왕들이 개성을 찾는 이유는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25일자 1번째 기사 -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9월 15일자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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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3월 5일자 5번째 기사
1392년 조선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1394년 새로 짓는 궁궐이 완성되기도 전에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기존 고려세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치적 이해와 더불어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지기(地氣)가 다한 개성을 벗어나 길지(吉地)인 한양에서 새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개성에 행차한 왕은 반드시 만월대에 올랐다. 간혹 만월대가 아닌 다른 곳을 유람하고자 해도 만월대는 반드시 가야 할 곳이었다. 1535년 9월 개성에 행차한 중종은 먼저 제사를 올린 후 명륜당에서 문과 시제를 내주고 박연폭포를 구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나서서 이를 극구 말리며 만월대를 찾아 고려가 왜 망하게 되었는지 지나간 역사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며 막아섰다. 결국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성균관에서 문과 과거를 치르게 한 후 바로 만월대로 가서 무과 시험을 참관했다. 그리고 다음날 박연폭포도 다녀왔다.
1693년 숙종이 개성에 행차했을 때는 제릉과 후릉을 다녀온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목청전 옛터를 찾아가 두루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만월대에서 문무과 과거를 보게 하고 만월대 남문루에 나아가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고, 개성 사람들에게 과세 되었던 곡식과 면포, 유철(鍮鐵) 1천 근 등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중종의 전례를 따라 개성 유생들에게 쌀과 베를 하사하고 돌아왔다.
영조는 1740년 9월 개성에 도착하자마자 만월대부터 찾았다. 영조는 개성까지 함께 온 신하들과 만월대를 둘러보며 곁에 있던 대신들에게 당파 싸움의 해악으로 인해 고려와 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며 염려하였다.
조선 왕들의 개성과 만월대 행차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고 이루어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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