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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개성에 행차하다

  • 한양으로 천도 후에도 조선의 왕들이 개성을 찾는 이유는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25일자 1번째 기사

  •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9월 15일자 3번째 기사

  •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3월 5일자 5번째 기사

1392년 조선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1394년 새로 짓는 궁궐이 완성되기도 전에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기존 고려세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치적 이해와 더불어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지기(地氣)가 다한 개성을 벗어나 길지(吉地)인 한양에서 새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 태조 3년(1392)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개성에 머무르게 했다는 기록(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개성은 고려의 그늘도 있지만,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한 곳이 개성의 수창궁이었고, 제2대 왕인 정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자의 난을 이유로 다시 천도한 곳도 개성이었다. 1405년(태종 5)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지만, 개성에는 태조의 정비이자 정종과 태종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가 묻힌 제릉이 있었고, 정종과 그 비인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이 있었다. 또한 태조의 잠저(潛邸)였다가 이후 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된 목청전도 있었다. 그래서 수백 년이 지난 1872년 개성에 행차했던 고종은 “개성부는 우리 조선으로 말하면 왕조가 일어난 고장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1872년(고종 9) 개성에 행차한 고종이 개성부의 의미에 관해 언급한 기록(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 대부분의 왕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해마다 제릉과 후릉에 친히 행차하여 제사를 올렸고, 목청전에 가서 참례를 올리고 돌아왔다. 개성에 가서 제사를 올리지 못할 때는 직접 축문을 써서 향과 함께 개성으로 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의 개성 행차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개성에 행차하여 친히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일은 유교국가 조선에서 효를 실천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줌은 물론 왕위의 정당성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행사였다.
 

▲ 1535년(중종 30) 영의정 김근사(金謹思)와 좌의정 김안로(金安老)가 만월대에 가야 한다고 중종을 설득한 기록(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개성에 행차한 왕은 반드시 만월대에 올랐다. 간혹 만월대가 아닌 다른 곳을 유람하고자 해도 만월대는 반드시 가야 할 곳이었다. 1535년 9월 개성에 행차한 중종은 먼저 제사를 올린 후 명륜당에서 문과 시제를 내주고 박연폭포를 구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나서서 이를 극구 말리며 만월대를 찾아 고려가 왜 망하게 되었는지 지나간 역사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며 막아섰다. 결국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성균관에서 문과 과거를 치르게 한 후 바로 만월대로 가서 무과 시험을 참관했다. 그리고 다음날 박연폭포도 다녀왔다.

 

1693년 숙종이 개성에 행차했을 때는 제릉과 후릉을 다녀온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목청전 옛터를 찾아가 두루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만월대에서 문무과 과거를 보게 하고 만월대 남문루에 나아가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고, 개성 사람들에게 과세 되었던 곡식과 면포, 유철(鍮鐵) 1천 근 등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중종의 전례를 따라 개성 유생들에게 쌀과 베를 하사하고 돌아왔다. 

 

영조는 1740년 9월 개성에 도착하자마자 만월대부터 찾았다. 영조는 개성까지 함께 온 신하들과 만월대를 둘러보며 곁에 있던 대신들에게 당파 싸움의 해악으로 인해 고려와 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며 염려하였다.

 

조선 왕들의 개성과 만월대 행차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고 이루어진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