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된 이후 곧바로 재건되지 못하였고, 조선이 수도를 서울로 정하면서 고려의 운명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궁궐의 아름답고 위엄있는 모습은 모두 사라졌고 그 흔적들은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은 만월대 서부건축군을 공동조사 구역으로 결정했습니다. 서부건축군에 대한 조사는 문헌상 내전(內殿)이라고 알려져 있던 사실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33,000㎡이나 되는 서부건축군은 조사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돌로 된 주춧돌과 기단 같은 것들만 드러나 있을 뿐 넓은 빈터에 풀만 무성한 상태였습니다.
조사단원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이곳에 왔는데 과연 여기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막막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공동 조사단은 시굴조사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화려했던 궁궐이라 해도 오랜 세월 빈터로 남아 있다 보니 사람들이 살던 흔적은 사라지고 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풀부터 베어야 했습니다.
풀을 베고 나니 드디어 유구들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고고학에서는 궁궐터·집터·절터에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유구라고 합니다. 유구는 유물과 달리 발굴했다고 해서 연구실로 가져올 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2007년 시굴조사 과정에서 특이한 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흔적은 다른 유구들과는 달리 건물 안에 다섯 개의 작은 방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조사단원들은 이 흔적을 그동안 기록 속에만 존재했던 ‘경령전(景靈殿)’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려사』에는 경령전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등장합니다. 경령전에 대한 첫 기록은 “덕종 즉위년(1031년) 왕위 계승을 선조들에게 고했다(庚子 謁景靈殿, 告卽位)”는 내용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을 통해 경령전을 처음 설치한 것이 덕종의 아버지인 현종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현종은 2차 거란침입으로 불탔던 궁궐을 재건하면서 중심건축군을 새롭게 지었으며, 나성(羅城)의 건축도 마무리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 과정에서 경령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입니다.
고려 왕은 설날·단오·추석·중구일(9월 9일)에 직접 경령전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국혼(國婚)이나 전쟁 등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에도 가서 아뢰었습니다. 고려의 왕들은 마치 효성스러운 아들이 살아계신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듯 조상님들의 진영이 모셔진 경령전에 수시로 들러 뜻을 묻고는 했을 것입니다.
다섯 개의 방 중에서 태조 왕건의 초상화인 진영은 어디에 모셔져 있었을까요?
다섯 개의 방 중에 가장 왼쪽에 태조 왕건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고 차례로 현 국왕의 직계 4대조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가운데 방에 태조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려사』에는 명절을 맞이하여 왕이 경령전에서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만으로는 그 실제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유구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그 모습이 보다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경령전에는 총 세 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의 가운데는 영혼 즉 조상님들이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왕은 동쪽계단을 이용하였고, 제사를 도와주는 신하들은 서쪽계단을 이용하였습니다.
왕은 제향을 위해 경령전에 오르기 전 동쪽계단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했습니다. 왕은 단 위에 오르면 우선 태조실 앞에서 두 번 절을 한 후 순서대로 5호실까지 각각 두 번씩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잔을 올렸습니다. 왕은 그 과정이 끝나면 다시 태조실로 돌아와 제관이 축문을 읽는 가운데 두 번 절을 하고 술을 마신(음복) 후 다시 두 번 절을 합니다. 왕은 태조실 문밖으로 나와 다시 두 번 절을 하고 동쪽계단으로 내려와 마지막으로 서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합니다. 왕은 경령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동안 총 몇 번 절을 했을까요? 서른 두 번이네요. 보통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사단은 경령전 터 앞에 또 하나의 유구(3-2호 건물지)를 발견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경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집희전(集禧殿)에서 준비를 마친 후 경령전으로 이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집희전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07년부터 시작된 공동조사에서 건물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경령전밖에 없습니다. 학자들이 경령전을 확신한 것은 문헌에서 보던 5개의 예단시설이 실제 유구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경령전이 위치한 ‘3건물지군’에서는 용문·봉황문·범자문 막새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주변이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기록을 확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전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는 남과 북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그 어려움이 더욱 큽니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이 힘을 합쳐 경령전을 찾은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선조들의 넋이 같은 뿌리를 가진 남북공동 조사단을 기다려 왔던 것은 아닐까요? 온갖 어려움을 딛고 찾아온 후손들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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