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나라, 고려
고려 금속활자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밀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치 만월대 빈터에 금속활자가 묻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려 금속활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불과 50년도 되지 않은 1972년의 일입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책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전시되면서부터입니다.
이 책에는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담겨있었습니다. 이것은 1440년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독일어 성경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금속활자는 우리 조상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 (출처 : 문화재청)
금속활자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도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선 것이 아니라 200년 앞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따르면,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갔던 1234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기록으로만 남겨져 있을 뿐 실제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이미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되기 오래전부터 금속활자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만월대가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불타버렸기 때문에, 새로 찾아낸 금속활자는 적어도 그 이전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된 1377년보다 15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을 발간하는데도 널리 쓰였습니다. 고려는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유교를 정치적 기틀로 삼아 그 사상을 학교를 통해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고려는 유교 경전을 송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했지만,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송나라에 책을 수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판으로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나무를 베어내어 오랜 시간 가공을 해야 했고, 일일이 손으로 글자를 새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목판 인쇄술은 한 가지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기에는 적합하였지만, 여러 종류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은 창의력을 발휘하여 낱글자를 금속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판을 짜서 찍어내는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법은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과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이 있습니다. 밀랍주조법은 밀랍과 황토를 사용하고 주물사주조법은 나무와 모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출토지와 사용처가 명확한 고려 금속활자의 출토
그렇다면 고려의 금속활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2015년 만월대에서 금속활자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과 북측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은 각각 한 점의 금속활자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측 소장 금속활자는 출처가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북측의 것은 만월대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궁궐에서 쓰던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015년 남북 공동조사를 통해 새로운 금속활자가 발견되었고, 2016년 북측이 또 다른 활자를 찾아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만월대에서 금속활자가 발견되면서 고려 금속활자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고려 금속활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만월대 발굴현장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과 북이 함께 발굴조사를 계속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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