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수학여행 떠나기 딱 좋은 곳, 개성이 붐빈다
『황성신문』 1908.10.23~24, 11.15
『대한매일신보』 1910.5.28
『매일신보』 1916.11.12, 1917.3.29
『동아일보』 1920.4.29, 1920.6.6, 1921.10.13, 1922.10.8, 1936.5.5, 1936.6.14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된 이후 철도는 점차 대중교통 시설로 자리를 잡아갔다. 개성은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닿는 곳으로 개성을 찾는 사람들도 그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리고 곧 답사와 수학여행지로 수많은 학생과 유람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의 수학여행 일정은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가장 빠른 기사는 1908년에 무관학교 생도들과 보성중학교 학생들이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기사이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수학여행 답사기도 많이 실렸다.
1921년 10월 14일 100명에 이르는 서울의 중앙고보 1학년생들은 개성으로 가는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아침 9시 50분에 출발해 11시 30분에 개성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16일 오후 5시 2분에 개성을 출발할 때까지 개성 곳곳을 답사했다.
도착 첫날에는 태평관 터, 수창궁 터, 개성 남대문, 자남산, 관덕정,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성균관, 송도고보를 방문하였다. 둘째 날에는 오전 6시에 출발해 박연폭포로 향했다. 서사정(逝斯亭)과 괴정(槐亭)을 지나 대흥산성 남문을 통과해 대흥사를 방문하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나와 박연폭포를 관람했다.
마지막 날에는 만월대로 답사하였는데 가는 길에 개성의 유명한 인삼을 가공하는 백삼 제조장을 참관하였다. 만월대 가까이 펼쳐진 능금밭을 지나고 높은 계단을 올라 만월대 위의 수많은 주춧돌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눌리문을 지나 태조 왕건의 현릉과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능을 답사하고, 두문동으로 향해 고려말 72현의 절개를 기리며 영조가 세운 비석을 가까이 보며 읽어본 후 개성역에 도착해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개성 관광과 수학여행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문제가 되었다. 개성에는 하루에 3천 명이 넘는 방문객으로 넘쳐났고, 관람을 온 사람들은 모두 만월대를 찾아 ‘수학여행단 사태’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고요하고 쓸쓸했던 만월대는 이제 무수히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앓을 지경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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