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 이야기 템플릿 (F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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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경령전 이야기타이틀 서브 영역 <기로세연계도〉는 조선 초기와 중기 이래의 전통적인 계축 형식을따른 점이 특기할 만 하다.
태조 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자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도적무리에 가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호족들은 스스로 뭉쳐 세력을 키워갔는데, 그들 중 견훤은 남쪽 지방에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는 옛 고구려지역인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후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집안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을 금성태수로 임명하고,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왕건은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명성과 덕망을 얻어갔다.
그러나 권력이 강성해진 궁예는 자신을 미륵이라 자처하며 수많은 신하를 의심하고 무참히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할 뜻을 밝혔다. 왕건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부인 유씨(柳氏)가 내어주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왕건이 일어서자 무수한 사람이 왕건을 따랐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철원성 포정전에서 태조로 즉위하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집안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을 금성태수로 임명하고,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왕건은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명성과 덕망을 얻어갔다.
그러나 권력이 강성해진 궁예는 자신을 미륵이라 자처하며 수많은 신하를 의심하고 무참히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할 뜻을 밝혔다. 왕건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부인 유씨(柳氏)가 내어주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왕건이 일어서자 무수한 사람이 왕건을 따랐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철원성 포정전에서 태조로 즉위하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태조 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자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도적무리에 가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호족들은 스스로 뭉쳐 세력을 키워갔는데, 그들 중 견훤은 남쪽 지방에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는 옛 고구려지역인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후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집안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을 금성태수로 임명하고,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왕건은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명성과 덕망을 얻어갔다.
그러나 권력이 강성해진 궁예는 자신을 미륵이라 자처하며 수많은 신하를 의심하고 무참히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할 뜻을 밝혔다. 왕건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부인 유씨(柳氏)가 내어주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왕건이 일어서자 무수한 사람이 왕건을 따랐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철원성 포정전에서 태조로 즉위하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집안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을 금성태수로 임명하고,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왕건은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명성과 덕망을 얻어갔다.
그러나 권력이 강성해진 궁예는 자신을 미륵이라 자처하며 수많은 신하를 의심하고 무참히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할 뜻을 밝혔다. 왕건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부인 유씨(柳氏)가 내어주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왕건이 일어서자 무수한 사람이 왕건을 따랐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철원성 포정전에서 태조로 즉위하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주석 및 참고
첨성대 하면 떠오르는 곳은 경주입니다. 그러나 개성에도 첨성대가 있습니다. 919년 고려 태조 왕건이 연경궁을 세울 즈음에 축조했다고 추정되는 개성 첨성대는 만월대 서쪽 궁성 터에 축대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견뎌 온 개성 첨성대는 돌벽돌로 차곡차곡 축조한 경주 첨성대와 달리 돌기둥을 세워 만들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개성 첨성대는 화강석으로 잘 다듬은 4개의 돌기둥을 네 귀퉁이와 중앙에 세웠는데 높이가 2.8m이고, 그 위에 약 2.6m 길이의 정사각형 석판(石板)이 올려져 있습니다. 네 개의 돌기둥은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어 있고, 치밀하게 다듬어져 결구 되어 있어 그 구조가 견고합니다. 기둥의 모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당시 관측시설을 고정했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년의 세월을 견뎌 온 개성 첨성대는 돌벽돌로 차곡차곡 축조한 경주 첨성대와 달리 돌기둥을 세워 만들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개성 첨성대는 화강석으로 잘 다듬은 4개의 돌기둥을 네 귀퉁이와 중앙에 세웠는데 높이가 2.8m이고, 그 위에 약 2.6m 길이의 정사각형 석판(石板)이 올려져 있습니다. 네 개의 돌기둥은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어 있고, 치밀하게 다듬어져 결구 되어 있어 그 구조가 견고합니다. 기둥의 모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당시 관측시설을 고정했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지금의 개성인 송악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자신이 태어나 살던 집을 중심으로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개성은 왕건의 조상 때부터 터를 잡고 살던 가문의 터전이기도 했다.
옛날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바다에 나갔다가 서해 용왕의 청을 들어주고 용왕의 딸인 용녀를 아내로 맞았다. 작제건이 용녀와 뭍으로 돌아올 때, 용왕이 준 일곱 가지 보물과 돼지를 받아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우러르며 예성강 강가에 영안성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작제건과 함께 영안성에 살게 된 용녀는 영안성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물을 길어다 썼다. 이곳이 개성의 대정으로 만월대 서쪽에 있다. 이후에 용녀를 원창왕후라 했다.
그런데 용궁에서 데리고 온 돼지가 1년이 되어도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용녀는 돼지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작제건과 용녀는 다음날부터 돼지가 드러누운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그 자리는 만월대 북쪽의 광명사 터이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은 아버지인 작제건이 지은 송악산 기슭의 집과 영안성을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는데, 꿈에서 본 여인과 매우 닮아 결국 그 여인과 혼인하였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부인이라 불렀는데, 이후 위숙왕후 한씨라 했다.
왕융은 몇 년 후 새집을 짓기 위해 좀 더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바로 만월대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의 장령전(옛 봉원전) 터이다.
왕융은 새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백두산에서 내려온 도선선사가 왕융이 짓는 집을 보고 보완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송악산 위에 올라 지세를 살폈고, 도선은 왕융에게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왕건에게 바칠 편지를 써주고 떠났다. 왕융이 도선의 말에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 몽부인은 왕건을 잉태하여 태조 왕건을 낳았다.
옛날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바다에 나갔다가 서해 용왕의 청을 들어주고 용왕의 딸인 용녀를 아내로 맞았다. 작제건이 용녀와 뭍으로 돌아올 때, 용왕이 준 일곱 가지 보물과 돼지를 받아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우러르며 예성강 강가에 영안성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작제건과 함께 영안성에 살게 된 용녀는 영안성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물을 길어다 썼다. 이곳이 개성의 대정으로 만월대 서쪽에 있다. 이후에 용녀를 원창왕후라 했다.
그런데 용궁에서 데리고 온 돼지가 1년이 되어도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용녀는 돼지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작제건과 용녀는 다음날부터 돼지가 드러누운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그 자리는 만월대 북쪽의 광명사 터이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은 아버지인 작제건이 지은 송악산 기슭의 집과 영안성을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는데, 꿈에서 본 여인과 매우 닮아 결국 그 여인과 혼인하였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부인이라 불렀는데, 이후 위숙왕후 한씨라 했다.
왕융은 몇 년 후 새집을 짓기 위해 좀 더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바로 만월대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의 장령전(옛 봉원전) 터이다.
왕융은 새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백두산에서 내려온 도선선사가 왕융이 짓는 집을 보고 보완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송악산 위에 올라 지세를 살폈고, 도선은 왕융에게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왕건에게 바칠 편지를 써주고 떠났다. 왕융이 도선의 말에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 몽부인은 왕건을 잉태하여 태조 왕건을 낳았다.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지금의 개성인 송악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자신이 태어나 살던 집을 중심으로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개성은 왕건의 조상 때부터 터를 잡고 살던 가문의 터전이기도 했다.
옛날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바다에 나갔다가 서해 용왕의 청을 들어주고 용왕의 딸인 용녀를 아내로 맞았다. 작제건이 용녀와 뭍으로 돌아올 때, 용왕이 준 일곱 가지 보물과 돼지를 받아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우러르며 예성강 강가에 영안성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작제건과 함께 영안성에 살게 된 용녀는 영안성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물을 길어다 썼다. 이곳이 개성의 대정으로 만월대 서쪽에 있다. 이후에 용녀를 원창왕후라 했다.
그런데 용궁에서 데리고 온 돼지가 1년이 되어도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용녀는 돼지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작제건과 용녀는 다음날부터 돼지가 드러누운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그 자리는 만월대 북쪽의 광명사 터이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은 아버지인 작제건이 지은 송악산 기슭의 집과 영안성을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는데, 꿈에서 본 여인과 매우 닮아 결국 그 여인과 혼인하였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부인이라 불렀는데, 이후 위숙왕후 한씨라 했다.
왕융은 몇 년 후 새집을 짓기 위해 좀 더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바로 만월대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의 장령전(옛 봉원전) 터이다.
왕융은 새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백두산에서 내려온 도선선사가 왕융이 짓는 집을 보고 보완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송악산 위에 올라 지세를 살폈고, 도선은 왕융에게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왕건에게 바칠 편지를 써주고 떠났다. 왕융이 도선의 말에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 몽부인은 왕건을 잉태하여 태조 왕건을 낳았다.
옛날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바다에 나갔다가 서해 용왕의 청을 들어주고 용왕의 딸인 용녀를 아내로 맞았다. 작제건이 용녀와 뭍으로 돌아올 때, 용왕이 준 일곱 가지 보물과 돼지를 받아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우러르며 예성강 강가에 영안성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작제건과 함께 영안성에 살게 된 용녀는 영안성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물을 길어다 썼다. 이곳이 개성의 대정으로 만월대 서쪽에 있다. 이후에 용녀를 원창왕후라 했다.
그런데 용궁에서 데리고 온 돼지가 1년이 되어도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용녀는 돼지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작제건과 용녀는 다음날부터 돼지가 드러누운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그 자리는 만월대 북쪽의 광명사 터이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은 아버지인 작제건이 지은 송악산 기슭의 집과 영안성을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는데, 꿈에서 본 여인과 매우 닮아 결국 그 여인과 혼인하였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부인이라 불렀는데, 이후 위숙왕후 한씨라 했다.
왕융은 몇 년 후 새집을 짓기 위해 좀 더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바로 만월대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의 장령전(옛 봉원전) 터이다.
왕융은 새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백두산에서 내려온 도선선사가 왕융이 짓는 집을 보고 보완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송악산 위에 올라 지세를 살폈고, 도선은 왕융에게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왕건에게 바칠 편지를 써주고 떠났다. 왕융이 도선의 말에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 몽부인은 왕건을 잉태하여 태조 왕건을 낳았다.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지금의 개성인 송악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자신이 태어나 살던 집을 중심으로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개성은 왕건의 조상 때부터 터를 잡고 살던 가문의 터전이기도 했다.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본래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1023년 건축)과 그 기단 일대를 가리키므로 이 궁궐의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월대라고 할 때에는 왕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정전인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만월대라고 할 때에는 왕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정전인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체플레이어 탑제-자리만 잡아놓습니다.
고려 왕궁터 '개성 만월대'발굴... 남북 함께 '구슬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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