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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금속활자와 만월대

고려는 왜 금속활자를 발명했을까?

 고려시대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겪었다. 그리고 귀족 지배 체제의 정치적 분열로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최충헌의 등장은 고려 무신정권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최씨무신정권은 독자적인 집권부를 갖추고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는 무신집권자 1인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아들 최이(?~1249)에 이르러 혼란했던 사회가 점차 안정기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최이는 무신출신이었지만, 정치를 위해 문신들로부터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서방(書房)을 설치하고, 문신 이규보(1168~1241)를 등용하는 등 새로운 문신들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신의 난을 겪으면서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책은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문신들을 양성하기 위해 책이 필요했고, 책을 만들기 위해 인쇄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책을 만드는 기술은 목판인쇄의 방법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목판의 경우 한번 판을 만들어 놓으면 같은 내용의 책은 반복적으로 인쇄가 가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여러 종류의 책을 만들고자 할 경우에는 일일이 판을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이 경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도 따랐다. 그리고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넓은 장소도 필요했다. 고려 사회는 귀족사회였기 때문에 다량의 인쇄보다는 빠른 기간 내에 여러 종류의 책을 간행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이에 목판인쇄에서 활자인쇄로 전환되면서 정보전달 매체가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활자의 재료로 나무가 아닌 금속을 이용하여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이다. .

 

 

고려 금속활자의 발상지는 강화도인가? 개성인가?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인쇄한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와 『상정예문(詳定禮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에 간행한 번각(飜刻) 목판본이 전하는데, 최이가 쓴 발문에 의하면, 장인들을 모집하여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새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으로 보아 1239년 이전에 이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금속활자로 인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보관토록 했다는 기록은 있다. 안타깝게도 위의 두 책은 전하지 않고 금속활자 인쇄의 기록만 남아있는 것이다.

▲ 『남명천화상송증도가』(최이의 발문),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1232년에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간행 연도로 보아 『상정예문』은 강화도에서 인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강화도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인가? 몽골과 전쟁중에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미 개성에서 만들어 보관하고 있던 금속활자를 최이가 계획적으로 천도하면서 강화도로 옮겨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금속활자의 발상지는 강화도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는?

 개성 만월대에서 금속활자가 발견되기 이전에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2점이 전하고 있었다. 남한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복(㠅)’자와 북한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旃+頁)’자이다.

 

 ‘복’자 활자는 일제강점기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것을 1913년 덕수궁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수집가 아카보시(赤星佐七)에게서 구입한 것이다. ‘전’자 활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 신봉문터로부터 서쪽 약 300m 지점에서 수집하였다고 한다.

 2015년 11월 7차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단이 만월대 서부 건축군 최남단 신봉문터 서쪽 약 255m 지점에서 유물을 찾기 위해 바닥의 흙을 체로 치는 과정에서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전(嫥)’자를 발견한 것이다. 크기는 가로 1.36㎝, 세로 1.3㎝, 높이 0.6㎝이다. 앞면에는 ‘전’자가 반전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은 반원형으로 홈이 파여있는 상태이다.

 

 그 외에도 북한 학술지 『민족문화유산』 2016년 3월호에는 북한 발굴단에 의해 ‘조(糟)’자, ‘명(名)’자, ‘측(㳁)’자, ‘명(眀)’자 등 4점의 금속활자를 더 수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문화유산』 2018년 4월호에는 개성 만월대 서부건축군 서남쪽 3호 축대부근에서 13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꽃모양 청자접시 안에 있던 ‘선(亻+扇)’자 활자가 출토되었다고 소개하였다.

 

▲선(亻+扇 )자 활자(화형청자접시안에 출토)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것은 모두 8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복’자를 제외하면 모두 개성 만월대 인근에서 찾아진 것이다. 이는 금속활자 인쇄를 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물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향후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진척되어 금속활자를 만들어 보관하던 주자소, 활자의 주조방법, 활자의 사용여부를 밝힐 수 있는 인쇄본의 확인 등 금속활자 관련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길 기대해 본다.

 

 

고려 금속활자 발명의 증거물은?

 1972년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도서의 해’였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에서는 국립도서관 주관으로 ‘책’이라는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이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 전시되면서 세계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1372년 9월에 성불산에서 제자 법린의 도움을 받아 부처와 인도, 중국의 조(선)사들이 깨달음을 가리켜 보인 중요한 절목을 뽑아 상·하권으로 편찬한 선불교 최고의 교과서이다. 백운화상이 77세에 입적함에 따라 그의 제자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1377년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이 소장되어 있다.

『직지』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실물 자료로써, 고려가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발명국임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에 유네스코에서는 『직지』를 현존하는 금속활자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인류의 인쇄 역사와 기술 변화를 알려주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증거물로 인정하여 2001년 9월 4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이제 『직지』는 금속활자 발명의 대명사로 인류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세계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황정하 / 서원대학교 객원교수, 전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