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첫 실무협의는 2006년 1월 21일~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쟁점은 발굴 대상지와 기간이었다. 북측은 남측이 제안한 흥왕사지(興王寺址)에 대해 2월 초 현지답사 후 최종 의견을 주겠다고 답했다. 문제는 발굴 기간이었다. 발굴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최소 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남측 인사가 평양이나 개성에 3개월 이상 체류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 북측은 이미 현대아산 등 남측 인력들이 개성공단에 상주하고 있으므로 발굴조사단이 비교적 장기간 상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구체적인 기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발굴조사의 난관이 하나 풀렸다.
두 번째 실무협의는 3월 18일~20일 개성에서 열렸다. 북측 문화보존지도국 리승혁 처장은 발굴 대상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흥왕사지를 답사해보니 유적지의 현황이 발굴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상황.
· 개성지역 최초의 남북공동 발굴조사인데 개성역사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만월대로 하는 것이 좋겠음.
· 만월대 중심건축군 서쪽에 위치한 약 33,000㎡의 건축군이 구체적인 대상임.
· 중심건축군은 6·25 이후 파괴된 유적정리 차원의 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서부건축군은 발굴조사를 한 적이 없음.
· 서부건축군은 전각들이 밀집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므로 공동발굴조사에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함.
· 이것은 개성역사지구 세계유산 등재에도 도움이 될 것임.
남측도 만월대를 발굴 대상 후보지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60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과연 성과가 있을 것인가, 6·25 때 미군이 막사를 지으며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던데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인가, 만월대 발굴 조사 후 북측이 성급하게 궁궐 복원을 서두르지 않겠는가 등 걱정과 기우가 많았다. 그러나 흥왕사지는 적절치 않다는 북측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한 개성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성급한 복원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만월대를 발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이후의 발굴 성과가 말해주듯 리승혁 처장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회담장에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렸는데 그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니었던 셈이다.
세 번째 실무협의가 6월 1일 개성에서 다시 열렸다. 대상지가 결정되었으니 이제 문제는 확정 짓지 못한 발굴 기간이었다. 남측은 90일을 제안했고, 북측은 60일 후 성과가 확인되면 그 후에 2차 발굴을 논의해보자고 했다. 북측은 남북 조사원들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데 따른 공안의 문제와 혹여 발굴 성과가 없을 경우의 우려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북측 의견대로 기간을 60일로 하는 것에 합의했다. 드디어 2년 넘게 걸친 협의 끝에 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다.
막상 합의서를 체결하니 발굴 착수식까지 한 달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역협 사무국을 비롯한 통일부, 문화재청 담당자들은 역사적인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를 위한 준비에 매달렸다. 남측 인원이 60일간 개성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 승인 절차, 예산 신청 및 공여, 발굴조사단의 선발, 발굴 자재·장비 구매, 물자 반출 인허가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관계자들 모두 매일 야근을 하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보통은 방북 일주일 전이면 날아오던 초청장이 6월 30일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대신 7월 1일 아침 “만월대 발굴조사를 미루자”는 청전벽력과 같은 팩스가 날아왔다. 그 내용은 “우리는 7월 초부터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를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통일부와 현대측의 문제로 7월 1일부터 남측 인원들의 개성시내 출입이 전면 중단되게 됨으로써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 실현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었다”는 것이었다. 역협은 긴급회의를 열고 당일 오후에 북측에 만월대 발굴조사를 예정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팩스를 보냈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남북이 어렵게 합의한 만월대 발굴조사가 돌연 연기된 것도 문제였지만, 현실적으로 인력·자재·장비의 구매·계약·용역을 처리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런데 7월 5일 아침 북측이 동해상에 북측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속보로 타전되었다. 미사일 발사는 2005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 금융제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10월 9일에는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북측이 최초의 핵실험을 단행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관계부처 장관들이 사퇴했고 유엔에서는 대북제재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정부는 남북 민간교류 단체들에게 일체의 대북사업 추진 중단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어두울 때 별이 가장 빛나듯 남북관계는 대결로 치달을 때 대화가 시작되고는 한다. 당시도 그랬다. 핵실험 직후 2개월 만인 12월 18일 6자회담이 개최되었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2월 13일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2·13 합의’)’에 합의하며 남북관계 진전에 기대를 높였다. 역협은 그 분위기를 틈타 북측에 다시금 실무협의를 제안했다.
2007년 첫 실무협의가 3월 15일~16일 개성에서 열렸다. 북측은 지난해 일방적으로 발굴조사를 미룬 것에 대해 “작년에 남측에서 만월대 공동발굴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남측에서 개성에 들어오더라도 곧 도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북측 사람들과 실무협의를 하다 보면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싸울 때도 있지만, 함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심전심 동료의식이 생기기도 한다. 발굴이 미뤄졌을 때 화도 많이 났지만, 그 말을 들으니 북측 실무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사인 간에도 만나서 대화를 해야 오해가 풀리는데 하물며 남북 간에는 오죽했으랴 싶은 마음과 함께. 이날 실무협의에서 2006년 6월에 맺은 합의서를 재확인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남북조사단은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단은 서부건축군에 위치했던 건물지 40여 동과 축대 및 배수로를 확인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사가 모두 끝나고 남측 단원들이 두 달간 함께 땀을 흘린 만월대 현장과 북측 단원들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북측 단원들은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고, 남측조사단도 연신 뒤돌아보며 안녕의 인사를 건넸다. 서먹함과 경계심을 갖고 시작한 발굴조사였지만, 두 달 만에 그들은 분단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정을 나눈 동료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월대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해 가을 남북의 정상은 ‘10·4선언’ 제6항에 “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키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역사’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에 만월대 발굴을 준비했던 실무자로서 그 단어의 무게감만큼 자부심도 크다. <끝>
예대열 / 순천대 인문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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