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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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 고려궁성 만월대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등재

    2013년 6월 23일 오후 2시 13분... 의장이 손에든 의사봉을 내리치자 각국 대표단 속에 자리하였던 북한 대표단이 일제히 일어서며 환호하였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로 축하 하였다. 이어진 개성역사유적지구 등재 확정에 대한 입장발표에서는 북한대표단은 흥분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등재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보존계획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가 등재되는 순간이었다.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남북의 노력은 2005년 11월 개성 현지에서 개최된 개성역사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지원을 위한 남북공동학술대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개성 역사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제안되었고 이후 제17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개성의 역사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고 보존관리 하는데 남과 북이 협력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 후 2006년 1월, 남과 북은 개성 역사유적 발굴에 대한 포괄적 합의서를 작성한 뒤 2월에는 북측이 발굴조사 대상으로 송악산 자락에 위치한 고려궁성 만월대를 제안하였다. 이후2007년부터 2018년까지 총 8차에 걸친 고려궁성 만월대에 대한 남북공동 발굴조사와 복구조사가 진행 되었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景福宮)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정궁은 무엇일까? 흔히들 만월대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한 나라의 왕이 살던 궁궐의 명칭으론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왕이 머물던 궁궐은 어떻게 불렸을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려시대 당시 궁궐을 뜻하는 특정한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국을 지향하던 고려사람들은 중국의 황제국와 같이 궁궐에 특정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궁궐은 어궐(御闕)·용궐(龍闕)·천궐(天闕)·북궐(北闕)·대내(大內)·제성(帝城)·본궐(本闕) 등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만월대’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시대에 작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만월대를 ‘정전 앞 계단’이라고 쓴 것에서 부터이다. 또한 이후에 작성된 『중경지』에서는 남효온(南孝溫)의 견해에 따라 “망월대(望月臺)가 궁궐 안에 있었는데 이와 발음이 비슷한 만월대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만월대’라는 명칭은 궁궐의 정전 앞 계단을 일컫는 것으로 ‘망월대’가 잘못 전해진 용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려의 정궁은 망월대 혹은 만월대로 불렸던 것일까? 이는 고려궁성의 흥망과 관련이 있다. 

     

     최초 개경은 궁예에 의해 수도로 이용되어 졌으며 당시에 쌓여진 발어참성(勃禦塹城)은 이후 고려궁성의 모태가 되었다. 고려의 건국 당시는 후삼국의 통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라 궁성을 비롯한 개경의 시설을 화려하게 꾸미기 보다는 이전의 궁예시절 성곽들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이유로 왕건 이후의 궁성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궁성에 대한 대규모의 중건은 광종(光宗)과 현종(顯宗)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광종은 즉위 원년인 950년 ‘황제’를 칭하며 연호 ‘광덕’(光德)을 반포하고 다음해 개경을 ‘황도’(皇都)로 칭하였다. 또한 961년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고 2년여에 걸친 궁성의 중건과 황성의 축조를 추진하였다. 이후 현종 즉위 원년인 1010년 ‘거란’(遼)의 2차 침입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된 개경은 1011년과 1020년 두 차례의 중건을 통해 ‘중세도시 개경’으로 탈바꿈 하게 되었으며 궁성을 상징하는 4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축대와 이전까지의 정전이었던 건덕전(乾德殿)을 대신한 새로운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이 세워져 황제국 고려의 위상을 떨쳤다.

     

     하지만 고종(高宗) 18년(1231)의 몽골 침입을 시작으로 궁성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게 된다. 원(元)의 부마국(鮒馬國)으로 전락한 고려는 더 이상 황제국이 아니었다. 궁성은 왕실의 행사를 진행하는 장소로 전락하였으며 기존 궁성의 역할은 개경 주변의 이궁(離宮)과 별궁(別宮)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궁성의 상징인 정전 즉 회경전과 건덕전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궁성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으로 폐허로 변하였으며 1392년 조선의 건국으로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고려말의 궁성은 정전인 회경전이 자리했던 곳에 현재의 모습과 같이 축대와 계단만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려말의 개성 사람들은 이곳에서 달을 바라보거나(望月) 보름달로 둥글게 차오른 달(滿月)을 바라보며 황제국 고려를 그리워했을 것이며 조선이 들어선 뒤에는 망국의 설움에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2007년 이후로 14년의 세월이 흘러...

     이런 설움을 씻어 버리려는 듯 고려궁성 만월대에서는 남과 북의 고고학·역사학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2007년부터 시작된 조사는 2018년까지 8차례에 걸쳐 공동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도 어떤 인연에서인지 첫삽을 뜨면서부터 계속 참여하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하게 거의 매번 발굴이 진행되는 기간 중 남북관계에 큰 변화가 있어왔다. 2018년에 진행된 8차 조사는 마침 평양 정상회담 직후라 남북의 조사단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질 남북관계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2007년 이후로 14년의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빠르기만하다. 지난 여덟 번의 조사를 돌이켜보면 나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유적에겐 죄송스러운 마음 뿐이다. 남북관계라는 특수하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진행하는 조사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변명일 뿐이다. 앞으로의 개성 만월대 조사는 지금까지의 여러 시행착오들을 잘 살펴 남과 북을 연결하는 ‘협력’의 장으로 한걸음 더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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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6차 만월대 발굴조사 착수식(2014.7.23.) 만월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념비 - (1) 2014년 6차 만월대 발굴조사 착수식(2014.7.23.) 만월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념비 - (1)

    ▲개성 만월대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념비 [기록보기]

     

    ▲2015년 7차 만월대 발굴조사 발굴현장을 둘러보는 남북공동학술토론회 및 전시회 개막식 참석자들에게 사적지를 설명하는 필자의 모습 [기록보기]

     

     

     

     

     

    박성진  /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조사단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관